커다란 탈을 뒤집어쓰고 무대에 올랐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조명이 켜지는 순간 탈 안쪽 플라스틱에 김이 서려눈앞이 완전히 하얘졌거든요. 이 작품은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몸에서 시작해 안으로 응축되고, 마침내 거대한 날개를 펼치는 존재의 세 단계 성장을 발레로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지금까지 올랐던 무대 중 가장 낯설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배운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미완성의 몸 —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잘 보였습니다발레를 오래 하면 무의식적으로 몸을 곧게 세우고, 동작의 선을 정돈하려는 습관이 붙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역할의 첫 번째 단계는 정반대를 요구했습니다.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탈을 뒤집어쓴 채,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이 움직이는 어린 존재를 표현해야 했거..
춤을 잘 춘다는 게 어려운 동작을 많이 보여준다는 뜻일까요? 저는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23년 헬로우뮤지움에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파도야 놀자』를 기반으로 한 공연에 '파도' 역할로 참여하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발레 테크닉은 거의 쓰지 못했고, 대신 천 수백 겹의 의상과 팔 하나의 흔들림만으로 아이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데려갔습니다.움직임의 언어 — 글 없이도 이야기가 완성되는 이유『파도야 놀자』에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텍스트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아이와 파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하게 느껴집니다. 이수지 작가는 이 작품에서 키네틱 내러티브(kinetic narrative), 즉 움직임 자체가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을 활용합니다. 여기서 ..
6개월 동안 폴댄스를 배워 공중에서 학이 되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제8전시실, 탄성 하나 없는 시멘트 바닥 위에서 토슈즈를 신고 춤을 춰야 했던 무대 이야기입니다. 《DMZ 극장》은 저에게 단순히 색다른 공연이 아니라, 예술의 경계와 제 몸이 가진 움직임의 경계를 동시에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다원예술로 재구성된 DMZ의 공간《DMZ 극장》은 정연두 작가와 연출가 수르야가 함께 만든 다원예술(interdisciplinary art) 프로젝트입니다. 여기서 다원예술이란 시각예술, 공연, 음악, 무용 등 둘 이상의 장르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형식을 말합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조용히 감상하는 방식도 아니고, 극장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방식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놓인..
솔직히 저는 처음에 의심했습니다. 매일 연습실에서 반복하는 플리에와 탄듀를, 관객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보여준다는 기획이 과연 공연이 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라보니 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발레스토리》는 발레리나가 무대에 오르기 전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그 훈련의 구조를 관객에게 그대로 펼쳐 보이는 작품입니다.바 연습, 기본기가 무대를 만든다발레 수업은 예외 없이 바(Barre)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바란 연습실 벽을 따라 설치된 손잡이 봉을 말하는데, 무용수는 이것을 짚고 서서 신체의 정렬과 균형을 하나씩 점검합니다. 저도 발레를 배운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순서를 건너뛴 적이 없습니다.바 연습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동작이 플리에(plié)입니다. 플리에란 무릎을 ..
《백설공주》 마녀 역 공연 당시 모습 | 사진: 개인 소장 발레에서 마녀 역할은 화려한 점프보다 팔 하나를 뻗는 마임 동작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제가 직접 《백설공주》의 왕비이자 마녀를 맡아 무대에 서봤을 때 이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동화가 발레로 재탄생할 때 관객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몸 전체로 빚어내는 감정의 밀도였습니다.마녀를 완성한 건 벨벳 드레스와 마임이었습니다우리 발레단이 《백설공주》를 새 레퍼토리로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속으로 작게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어린 시절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그림책으로 수도 없이 만났던 이야기가 직접 서는 무대의 작품이 된다는 게 그냥 좋았습니다.제가 맡은 역할은 왕비이자 마녀였습니다. 의..
사진 설명: 창작발레 《콩쥐팥쥐》 공연 당시 모습 출처: 개인 소장 사진 솔직히 저는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발레로 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발레단에 들어오기 전까지는요. 《콩쥐팥쥐》를 처음 기획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단원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는데, 막상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클래식 발레가 얼마나 넓은 언어인지를 다시 배웠습니다. 팥쥐 엄마 역할을 직접 맡아 연기하며 느낀 것들을 정리해봤습니다.전래동화가 발레 무대에 오르기까지제가 학창 시절 접했던 발레 레퍼토리는 대부분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처럼 서양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요즘이야 《심청》이나 《춘향》 같은 한국 소재 발레를 접할 기회가 생겼지만, 그것도 비교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