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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잘 춘다는 게 어려운 동작을 많이 보여준다는 뜻일까요? 저는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23년 헬로우뮤지움에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파도야 놀자』를 기반으로 한 공연에 '파도' 역할로 참여하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발레 테크닉은 거의 쓰지 못했고, 대신 천 수백 겹의 의상과 팔 하나의 흔들림만으로 아이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데려갔습니다.

사진 출처: 2023 헬로우뮤지움 『파도야 놀자』 공연, 본인 소장

움직임의 언어 — 글 없이도 이야기가 완성되는 이유

『파도야 놀자』에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텍스트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아이와 파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하게 느껴집니다. 이수지 작가는 이 작품에서 키네틱 내러티브(kinetic narrative), 즉 움직임 자체가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을 활용합니다. 여기서 키네틱 내러티브란 등장인물의 방향, 속도, 거리 변화가 문장을 대신해 감정의 흐름을 전달하는 기법입니다. 처음에는 파도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아이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파도가 밀려오면 달아났다가 다시 달려오는 그 반복 자체가 하나의 대화입니다.

특히 제가 인상 깊게 본 것은 제본선(gutter)을 경계로 활용한 구성입니다. 그림책의 가운데 접힌 부분, 즉 제본선은 보통 독자가 신경 쓰지 않는 물리적 요소인데, 이 작품에서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처럼 기능합니다. 처음에는 아이와 파도가 제본선 양쪽에 분리되어 있다가,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파도가 아이의 영역을 침범하고 결국 경계 자체가 무너집니다. 글 한 줄 없이 공간의 배치만으로 긴장과 해소를 만들어낸 셈입니다.

저는 이 구조가 무용의 공간 활용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용에서 무용수가 무대의 어느 쪽에 서느냐,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느냐는 단순한 동선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배치하는 행위입니다. 그림책이 평면 위에서 그 원리를 구현했다면, 공연은 그것을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합니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이 오랫동안 공연 예술 관계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출처: 비룡소 『파도야 놀자』 도서 정보).

파도의 움직임은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작아졌다가 거대해지고, 부드럽게 흐르다가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뿜어냅니다. 이 불규칙성을 몸으로 옮기려면 정해진 안무를 외우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파도의 물성(物性) — 물질이 가진 고유한 성질 — 을 먼저 이해하고, 그 성질이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준비 기간 동안 저는 파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가 되려고 했습니다.

  • 키네틱 내러티브: 움직임의 방향·속도·거리만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기법
  • 제본선(gutter) 활용: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물리적 공간으로 시각화
  • 물성(物性) 기반 움직임: 동작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성질을 체화하는 접근
요약: 『파도야 놀자』는 글 없이 움직임과 공간 배치만으로 서사를 완성하는 작품이며, 이 원리는 무용의 공간 언어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사진 출처: 2023 헬로우뮤지움 『파도야 놀자』 공연, 본인 소장

몸의 표현과 어린이 공연 — 단순한 동작이 만든 가장 강한 장면

헬로우뮤지움 전시 공간에는 불가사리, 낙지, 조개 등 바다 생물 오브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그것들을 직접 만지고 돌아다니며 그림책 속 바다를 온몸으로 탐색했습니다. 그리고 체험이 끝난 뒤 움직임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9인치 가보시힐(gavoshi heel) 위에 수백 겹의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의상을 입고 파도로 등장했습니다. 가보시힐이란 플랫폼 밑창과 굽이 일체형으로 제작된 높은 신발로, 착용 시 무게중심이 크게 달라져 일반적인 발레 테크닉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평소 발레 무대에서는 정확한 발 포지션, 턴아웃(turn-out, 발끝을 바깥쪽으로 회전시키는 발레의 기본 자세)과 같은 테크닉이 중심인데, 이 공연에서는 그것을 대부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높은 신발, 긴 의상, 아이들과 가까운 거리, 비정형 공간이라는 네 가지 조건이 겹치면서 저는 동선과 움직임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습니다. 결국 파도를 전달하는 핵심 수단은 크고 넓게 펼쳐지는 팔의 움직임과 의상이 만들어내는 나풀거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명이 켜지고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수백 겹의 천이 움직임을 따라 출렁이면서 정말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가 다가가면 아이들이 웃으며 피했고, 제가 물러서면 아이들이 다시 가까이 달려왔습니다. 그림책 속 장면이 현실에서 다시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놀이동산에서 디즈니 캐릭터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림으로만 보던 존재가 눈앞에서 움직이고 자신에게 다가올 때의 그 설렘. 아마 그날의 아이들도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어떤 고난도 기술도 주지 못하는 종류의 감동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저는 무대 공연과 참여형 퍼포먼스(participatory performance)의 차이를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참여형 퍼포먼스란 관객이 단순히 바라보는 것을 넘어 공연의 흐름 자체에 개입하고 반응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형식입니다. 일반 공연에서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분명하고 관객은 완성된 결과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이곳에서는 아이들의 반응이 매 공연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정해진 안무를 정확하게 수행하는 능력보다, 그 순간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출처: 헬로우뮤지움).

제가 그날 보여준 것은 복잡한 발레 동작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의상과 공간, 설치물이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제 신체가 단독으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습니다. 무용수 혼자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 저는 그날 이후 그 믿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요약: 제한된 조건 속에서 단순한 움직임과 의상의 결합이 오히려 더 강한 장면을 만들었고, 참여형 퍼포먼스에서는 기술보다 즉각적인 반응이 공연의 핵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파도야 놀자』는 몇 살 아이들에게 적합한가요?

A. 출판사 비룡소는 3세 이상을 권장하지만, 제가 직접 공연 현장에서 본 반응으로는 2세 아이도 파도의 움직임에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텍스트가 없는 그림책이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는 영아도 그림과 움직임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어른이 읽어도 움직임 언어의 깊이를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Q. 헬로우뮤지움 파도야 놀자 전시는 지금도 운영 중인가요?

A. 제가 참여한 프로젝트는 2023년에 진행된 특별 기획이었습니다. 헬로우뮤지움은 어린이 미술관으로 그림책 연계 전시를 정기적으로 기획하는 곳인데, 현재 운영 중인 전시 일정은 공식 채널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시즌별로 구성이 바뀌기 때문에 방문 전 예약 여부도 함께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Q. 그림책을 활용한 어린이 공연, 어떤 점이 일반 공연과 다른가요?

A. 가장 큰 차이는 관객이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일반 공연에서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지만, 참여형 그림책 공연에서는 직접 달리고 피하고 다가오면서 스스로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제 경험상 이 차이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습니다. 단순히 '봤다'가 아니라 '함께 놀았다'는 기억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Q. 무용수가 어린이 공연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A. 제가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예측 불가능성이었습니다. 성인 관객은 공연 규칙 안에서 움직이지만, 아이들은 언제든 달려오거나 갑자기 멈추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갑니다. 그 순간마다 안무를 고집하면 오히려 공연이 어색해집니다. 즉흥적으로 반응하되 작품의 감정선을 잃지 않는 균형이 어린이 공연에서 무용수에게 요구되는 가장 섬세한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파도야 놀자』 공연을 마친 뒤 저는 오랫동안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발레 슈즈를 신고 정확한 포지션으로 서 있던 수많은 무대가 아니라, 가보시힐을 신고 천 조각을 달랑이며 아이들과 뛰어다녔던 그 공간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좋은 공연이 반드시 어려운 동작을 많이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저는 그날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림책 『파도야 놀자』가 관심 있으시다면, 책을 읽은 뒤 아이와 함께 파도를 흉내 내보시길 권합니다. 팔을 크게 흔들며 다가가고, 상대가 달아나면 따라가고, 다시 물러서며 기다리는 그 놀이 자체가 이미 이 그림책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림책을 공간과 몸으로 확장한 퍼포먼스를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이 어린이 대상이라도 주저하지 말고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 경험이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출처: 비룡소 『파도야 놀자』 도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