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솔직히 말하면, 사울왕 역할을 맡았다는 통보를 받은 날 밤에 잠을 잘 못 잤습니다. 기쁘기보다 무거웠습니다. 《다윗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성경 속 이야기였는데, 막상 그 안에서 가장 어두운 감정을 가진 인물을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연습이 시작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팔을 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사울왕이라는 인물, 단순한 악역이 아니었습니다
《다윗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경 원문을 다시 읽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을 펼쳐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처음부터 따라갔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에서 23절을 보면, 사울이 극심한 번민 속에 있을 때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청년 다윗을 데려오고, 다윗의 연주를 들은 사울이 편안함을 얻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출처: Bible Gateway, 사무엘상 16:14-23). 다윗은 전사이기 이전에 음악가였고, 사울은 그 음악으로 위안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지는 장면은 단순한 폭군의 광기가 아닙니다. 한때 자신을 위로해주었던 사람을 이제는 두려워하게 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뒤 사람들의 사랑이 다윗에게 쏠리자, 사울 안에서 애정이 질투로, 신뢰가 공포로 바뀌어 갑니다.
이 감정의 궤적을 이해하고 나서야 제가 어떤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만 내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결국 미워하게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 다윗은 목동이자 수금 연주자로 처음 사울의 곁에 불려온 인물
- 사울의 번민을 달래주던 음악가가 골리앗을 쓰러뜨린 뒤 민심의 중심이 됨
- 사울의 감정 변화는 애정 → 질투 → 두려움 → 분노의 순서로 진행
- 다윗은 사울을 해칠 기회가 생겼을 때도 칼을 거두는 절제를 보임
"팔을 더 써"라는 말이 제게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연습이 시작되고 나서 선생님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팔을 더 크게 써라"였습니다. 처음엔 솔직히 억울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팔을 끝까지 뻗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의상을 입고 나서 그 이유를 조금 이해하게 됐습니다. 《다윗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 때문에 의상은 일반적인 클래식 발레 튀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몸을 상당 부분 가리는 형태였고, 팔과 다리의 라인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평소와 똑같이 움직이면 동작이 의상에 묻혀 객석에서는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포르 드 브라(Port de bras)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포르 드 브라란 발레에서 팔의 움직임과 흐름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단순히 팔을 어떤 위치에 가져다 놓느냐가 아니라 팔이 공간을 어떻게 통과하느냐를 다루는 기술입니다. 저는 그동안 포르 드 브라를 '정해진 위치에 팔을 가져가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느 날 이런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팔이 어깨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몸속 깊은 곳에 있는 견갑골, 즉 날개뼈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상상하라고요. 그리고 손끝에 도달했다고 멈추지 말고,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선이 연습실 창문을 뚫고 저 멀리까지 계속 뻗어나간다는 느낌으로 사용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솔직히 웃음이 나왔습니다. 창문을 뚫는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다시 팔을 뻗었더니, 분명히 똑같은 제 팔인데 이전과 전혀 다른 크기로 보였습니다. 팔이 길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에너지가 견갑골에서 시작해 손끝 너머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동작을 했다는 것"과 "동작이 보였다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제대로 느꼈습니다. 무대에서 전달되지 않는 움직임은, 하지 않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질투와 분노를 춤으로 표현한다는 것, 생각보다 훨씬 섬세한 일이었습니다
팔 동작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 감정의 조절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질투하고 두려워하며 결국 미워하게 되는 감정을 무대 위에서 신체로 표현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냥 화난 표정을 만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 인물이 단조로워졌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을 찡그리고 힘으로만 밀어붙이면, 관객 입장에서는 사울이 그냥 처음부터 나쁜 왕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가진 비극적인 무게가 사라집니다.
마임(mime)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마임이란 발레에서 대사 없이 몸짓과 시선만으로 감정과 서사를 전달하는 기법을 가리킵니다. 클래식 발레에서는 정형화된 마임 동작이 있지만, 《다윗 이야기》 같은 창작발레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인물의 내면을 몸으로 풀어냅니다. 저는 이 마임을 활용해 사울이 다윗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연주할 때 편안하게 귀를 기울이던 사울이, 어느 순간 그 연주자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결국 그 손에 창을 드는 장면까지. 감정의 크기를 처음엔 작게 유지하다가 점점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접근했더니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발레 표현 기법 측면에서도 사울왕은 상당한 도전이었습니다. 몸을 많이 가리는 의상 때문에 하체의 라인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상체와 시선, 팔의 방향만으로 권위와 감정 변화를 동시에 전달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척추의 코어(중심근육)를 의식적으로 더 강하게 사용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코어란 몸통을 지지하는 심부 근육군을 가리키는데, 상체 표현의 힘과 안정감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출처: Bible Gateway, 사무엘상 18:6-9, 사울의 질투가 시작되는 장면).
결국 제가 사울왕을 통해 배운 것은, 무대에서 강렬한 인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기보다 변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까지 전달하느냐, 그것이 연기의 핵심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다윗 이야기》는 정해진 고전발레 레퍼토리인가요?
A. 아닙니다. 《백조의 호수》나 《지젤》처럼 고정된 원전이 있는 클래식 레퍼토리가 아니라, 성경 속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안무가가 음악과 장면 구성을 새롭게 만드는 창작발레 작품의 소재입니다. 그래서 공연 단체나 안무가에 따라 구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발레에서 팔을 크게 쓰라는 말이 실제로 무슨 의미인가요?
A. 단순히 팔을 멀리 뻗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포르 드 브라, 즉 팔의 에너지 흐름이 견갑골(날개뼈)에서 시작해 손끝을 넘어 공간 끝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팔의 물리적 길이는 같아도 에너지가 끊기지 않으면 동작이 훨씬 크고 강하게 보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을 때 이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Q. 창작발레에서 사울왕처럼 감정 변화가 큰 역할은 어떻게 준비하나요?
A. 먼저 인물의 감정이 어떤 순서로 변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에서 질투로, 질투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분노로 이어지는 흐름을 파악한 뒤, 처음부터 감정을 크게 쏟아내지 않고 점진적으로 증폭시키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마임 기법을 활용해 시선과 상체 방향으로 감정을 조금씩 쌓아가는 방식이 효과적이었습니다.
Q. 성경 내용을 모르면 《다윗 이야기》 공연을 이해하기 어렵나요?
A. 제 경험상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성경을 모르는 분들께도 비교적 익숙한 편이고, 발레는 대사 없이 몸짓과 음악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에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만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는 배경을 알고 보면 사울의 감정 변화가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결론
《다윗 이야기》는 제게 단순히 성경 속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팔은 정해진 길이를 가지고 있지만, 무대 위에서 그 팔이 어떻게 보이느냐는 신체 조건이 아니라 에너지의 방향에 달려 있었습니다. 감정은 크게 표현한다고 강렬해지는 게 아니라,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흘러가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사울왕을 통해 배웠습니다.
성경 속 이야기가 발레라는 언어를 만났을 때, 말 한마디 없이도 사랑과 질투와 두려움이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섬세하고 복잡한 작업인지를 이번에 처음 제대로 느꼈습니다. 창작발레에 관심이 생기신 분이라면, 공연을 직접 보기 전에 다윗과 사울의 관계 흐름만 간단히 훑어보고 가시길 권합니다. 같은 무대가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발레와 움직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개미와 베짱이 발레 (우화, 베짱이 역할, 창작발레) (0) | 2026.08.14 |
|---|---|
| 공작과 두루미 (이솝 우화, 발레 표현, 포르 드 브라) (0) | 2026.08.14 |
| 발레 헨젤과 그레텔 (마녀 역할, 캐릭터 연구, 무대 표현) (0) | 2026.08.13 |
| 해적 발레 (스토리와 테크닉, 그랑 파드되) (0) | 2026.08.12 |
| 라 바야데르 (망령들의 왕국, 군무, 백색 발레) (0) | 2026.08.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