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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 발표 날, 마녀 역할을 받았다는 걸 확인하고 속으로 "됐다"를 외쳤습니다. 발레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 형제의 동화를 춤과 마임(mime)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마녀를 연기하면서 테크닉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고,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보려 합니다.
마녀 역할을 받던 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발레단에서 새 작품이 결정되면 배역 발표까지의 시간이 항상 긴장됩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이야기 구조가 뚜렷한 창작발레(original ballet)에서는 각 역할의 성격이 워낙 뚜렷해서 더 그랬습니다. 여기서 창작발레란 기존의 클래식 레퍼토리가 아니라 안무가가 새롭게 구성한 작품을 가리킵니다.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발레단과 안무가에 따라 등장인물의 해석, 음악 선택, 장면 구성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이 장르의 묘미입니다.
저는 평소에도 순하고 예쁜 역할보다 성격이 강한 역할에 더 끌리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녀가 제 차례라는 걸 알았을 때, 부담보다 설렘이 앞섰습니다. 마녀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만드는 인물인 동시에, 표현 방식에 따라 작품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무섭게만 표현하는 것보다 익살스럽고 개성 있는 방식으로 풀어낼 때 오히려 어린 관객에게도, 어른 관객에게도 더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방향으로 캐릭터를 잡아가고 싶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은 어린 시절 집 책장에서 꺼내 읽던 동화였습니다. 발레를 하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그 상상 속 세계에 제가 직접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이번엔 그 세계의 가장 위험한 인물로 들어가게 된 셈이었습니다.
- 창작발레는 안무가와 발레단마다 인물 해석과 장면 구성이 달라진다
- 마녀처럼 개성이 강한 역할은 정형화된 테크닉보다 캐릭터 이해가 우선이다
- 어린 시절 읽은 동화 속 인물이 된다는 경험 자체가 발레의 특별한 매력 중 하나다

캐릭터 연구, 선배 영상보다 고양이가 더 도움이 됐습니다
배역이 정해지면 제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같은 역할을 했던 선배 무용수들의 영상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영상은 동작의 큰 흐름과 감각을 이해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번에는 영상을 보면서 오히려 고민이 더 깊어졌습니다. '나는 저 마녀와 어떻게 달라야 하지?'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거든요.
발레에서는 마임(mime), 즉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만으로 상황과 감정을 전달하는 표현 기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임이란 말과 소리를 배제하고 신체의 움직임만으로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퍼포먼스 언어를 뜻합니다. 특히 《헨젤과 그레텔》처럼 이야기의 기복이 뚜렷한 작품에서는 마임의 정확도가 관객의 몰입을 좌우합니다. 아이들을 찾아 헤매는 마녀, 과자집으로 유인하는 마녀, 분노하는 마녀까지 매 장면 감정의 결이 달라져야 했습니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이 숨어버리고 마녀가 두 아이를 찾아 무대를 헤매는 장면이었는데,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따라오질 않았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영아, 너 고양이 키우지? 고양이가 무언가를 찾을 때 코를 킁킁거리며 골똘히 집중하는 모습을 상상해서 여기에 넣어봐." 그 말을 듣는 순간, 저희 고양이가 간식 냄새를 맡고 두리번거리던 장면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동작이 한 번에 풀렸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레슨 순간입니다.
일반적으로 발레 훈련은 바(barre) 워밍업부터 센터 동작, 앙상블 연습까지 기술적 반복이 중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캐릭터를 표현하는 단계에서는 기술 반복 이상의 감각이 필요하다는 걸 이 작품에서 배웠습니다.
출처: Scottish Ballet에서도 《헨젤과 그레텔》을 소개하며 무용수의 표현력과 캐릭터 구현을 작품의 핵심 요소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대 표현은 결국 살아온 시간에서 나온다
고양이 에피소드 이후로 저는 연습 방식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스튜디오 밖에서 보이는 것들을 훨씬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놀랄 때 순간적으로 취하는 자세, 누군가를 찾을 때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 기대했다가 실망했을 때 어깨가 내려앉는 모양 같은 것들이요. 이런 관찰이 무대에서 앙트르샤(entrechat)나 피루엣(pirouette) 같은 기교적 동작 못지않게 표현의 밀도를 높여준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됐습니다. 앙트르샤란 점프 중에 다리를 교차하는 발레 테크닉이고, 피루엣이란 한 발로 축을 삼아 빠르게 회전하는 동작을 말합니다.
물론 테크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적 완성도가 뒷받침되어야 표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려운 동작을 얼마나 많이 해냈느냐만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특히 이야기 중심의 발레에서는 그렇다는 걸 《헨젤과 그레텔》이 가르쳐줬습니다. 마녀처럼 개성이 강한 캐릭터는 작은 손짓 하나, 시선 하나로 음흉함과 당황스러움을 동시에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발레는 몸으로 하는 예술이니 몸 훈련만 하면 된다"는 시각과 "삶의 경험 전체가 무용수의 재료가 된다"는 시각 중에서 후자에 더 무게를 두게 됐습니다. 실제로 그림 형제의 동화가 지금까지도 다양한 무대예술로 재해석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야기 안에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두려움과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무용수가 그 감정을 직접 겪어본 사람처럼 표현할 수 있을 때 관객은 대사 없이도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출처: Grimm Stories에서 원작 《헨젤과 그레텔》의 전문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작이 담고 있는 감정의 층위가 얼마나 두터운지 다시 읽어보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제가 직접 해봤더니, 캐릭터를 공부할 때 인물이 처한 상황을 제 삶의 경험과 연결 짓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감정인지 직접 겪어봤거나 옆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으면,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발레 《헨젤과 그레텔》은 어린이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인가요?
A.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대사 없이 춤과 몸짓만으로 따라가는 경험이 어린 관객에게는 오히려 새롭고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다만 마녀 장면이 표현 방식에 따라 다소 강렬하게 연출될 수 있어서, 발레단마다 연출 방향이 다르다는 점은 미리 확인해두는 편이 좋습니다.
Q. 발레에서 마임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A. 발레는 대사가 없는 예술 형식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 몸짓과 표정, 그리고 마임입니다. 특히 《헨젤과 그레텔》처럼 서사 구조가 명확한 작품에서는 마임의 정확도가 관객의 이해도를 직접적으로 좌우합니다. 테크닉이 아무리 뛰어나도 감정이 전달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끊기는 느낌이 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창작발레와 클래식 발레는 어떻게 다른가요?
A. 클래식 발레는 《백조의 호수》나 《지젤》처럼 오랜 시간 검증된 레퍼토리를 뜻하고, 창작발레는 안무가가 새롭게 구성한 작품을 가리킵니다. 창작발레는 같은 원작이라도 발레단과 안무가에 따라 음악, 의상, 인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감상 포인트도 달라집니다. 저는 이 자유도가 창작발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봅니다.
Q. 발레 무용수가 캐릭터를 연구할 때 어떤 방법을 쓰나요?
A. 선배 무용수의 영상 참고, 원작 동화나 원전 자료 읽기, 그리고 일상에서의 관찰이 주된 방법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상 속 관찰이 가장 직접적인 힌트를 준다고 느꼈습니다. 고양이의 움직임이 마녀의 동작을 풀어준 것처럼, 몸이 기억하는 실제 경험에서 나온 표현이 무대 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납니다.
결론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는 제게 단순히 재미있는 배역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확한 동작을 수행하는 것과 살아 있는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해준 작품입니다. 발레에서 피루엣이나 앙트르샤 같은 테크닉적 완성도는 기본 전제이고, 그 위에 캐릭터를 입히는 작업이 따로 필요합니다.
저는 이후에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발레 공연을 앞두고 있다면, 테크닉 연습만큼 일상 속 관찰과 다양한 경험에도 시간을 쓰는 것이 캐릭터를 깊이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무용수가 테크닉만 뛰어난 사람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제 경험상 무대 위에서 오래 기억되는 인물은 그 캐릭터를 진짜로 이해한 사람이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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