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사울왕 역할을 맡았다는 통보를 받은 날 밤에 잠을 잘 못 잤습니다. 기쁘기보다 무거웠습니다. 《다윗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성경 속 이야기였는데, 막상 그 안에서 가장 어두운 감정을 가진 인물을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연습이 시작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팔을 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사울왕이라는 인물, 단순한 악역이 아니었습니다《다윗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경 원문을 다시 읽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을 펼쳐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처음부터 따라갔습니다.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에서 23절을 보면, 사울..
배역 발표 날, 마녀 역할을 받았다는 걸 확인하고 속으로 "됐다"를 외쳤습니다. 발레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 형제의 동화를 춤과 마임(mime)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마녀를 연기하면서 테크닉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고,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보려 합니다.마녀 역할을 받던 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발레단에서 새 작품이 결정되면 배역 발표까지의 시간이 항상 긴장됩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이야기 구조가 뚜렷한 창작발레(original ballet)에서는 각 역할의 성격이 워낙 뚜렷해서 더 그랬습니다. 여기서 창작발레란 기존의 클래식 레퍼토리가 아니라 안무가가 새롭게 구성한 작품을 가리킵니다.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발레단과 안무가에 따라..
사진: Erik Doble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솔직히 저는 처음에 《해적》을 그냥 화려한 기술 경연 같은 작품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점프 높이, 회전 수, 그런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직접 연습하고 무대에 올려보고 나서야 이 작품이 얼마나 다층적인 매력을 가졌는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모험과 사랑, 화려한 테크닉, 그리고 무용수마다 전혀 다르게 펼쳐지는 그랑 파드되까지. 제가 경험하고 느낀 《해적》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해적의 스토리와 테크닉 — 모험극이 품은 발레의 언어《해적(Le Corsaire)》은 영국 시인 바이런의 서사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클래식 발레입니다. 줄거리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노예 메도라와 해적의 우두머리 콘라드의 사..
수십 명의 무용수가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순간, 클래식 발레의 진짜 무게가 느껴집니다. 《라 바야데르》의 '망령들의 왕국'은 단 한 명의 솔리스트도 없이 군무만으로 객석을 압도하는, 발레 역사상 가장 정교한 앙상블 장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저도 학창 시절 여름방학 공연으로 이 작품을 직접 무대에 올렸는데, 그때 처음으로 '혼자 잘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뼈저리게 배웠습니다.망령들의 왕국 — 군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라 바야데르》는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사원의 무희 니키아와 전사 솔로르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입니다. 감자티의 질투로 독사에 물려 죽음을 맞은 니키아, 그리고 슬픔에 빠진 솔로르가 환상 속에서 그녀와 재회하는 장면이 바로 '망령들의 왕국'입니다. 여기서 백색 발레(Whit..
솔직히 저는 처음에 별사탕요정의 음악이 오르골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백화점에서 받아 온 크리스마스 카드, 그 도로롱거리는 맑은 소리와 너무 닮아 있어서요. 나중에야 '첼레스타'라는 건반악기였다는 걸 알았지만, 그 설렘 덕분에 호두까기 인형이라는 작품을 오래도록 곁에 두게 되었습니다. 줄거리부터 캐릭터 춤, 그리고 사탕요정의 그랑 파드되까지 제가 직접 몸으로 겪으며 알게 된 이야기들을 나눠보겠습니다.크리스마스이브의 꿈, 호두까기 인형 줄거리《호두까기 인형》은 크리스마스이브를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발레 작품입니다. 주인공 클라라는 대부 드로셀마이어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고, 모두가 잠든 밤 다시 찾아온 거실에서 상상도 못 한 광경을 마주합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천장까지 커지고..
무대 위의 오로라는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처음 봤을 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연습해보니, 그 가벼움 뒤에 얼마나 많은 게 숨어 있는지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동화처럼 읽히는 줄거리 뒤로 클래식 발레의 정교함이 촘촘하게 쌓여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1막의 로즈 아다지오는 보는 것과 추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몸으로 가르쳐준 장면이었습니다.줄거리 — 동화 뒤에 숨은 발레의 구조《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이야기는 오로라 공주의 탄생 축하연에서 시작됩니다. 왕과 왕비가 성대한 연회를 열고 여러 요정들이 찾아와 공주에게 축복을 선물하는 장면인데, 이 축복들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후 극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그런데 초대받지 못한 사악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