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를 맨발로 걸으면 발밑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무척 부드럽습니다. 바닷물에 젖은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촉촉하게 닿고,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풍경이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싶게 만듭니다. 저 역시 바닷가를 배경으로 발레 동작을 연결하면 무대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아름다운 장면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모래 위에서 움직여보니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평소 연습실에서 어렵지 않게 하던 동작조차 여러 번 실패하면서, 무용수에게 바닥이 얼마나 중요한 조건인지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중심을 허락하지 않았던 모래바닷물에 젖은 모래는 걷기에는 포근하고 부드러웠습니다. 발바닥에 닿는 촉촉한 감촉도 무척 기분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위에서 발레 동작을 시작하자 모래는 전혀 다른..
거미줄이 드리워진 어두운 공간에서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박쥐가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와 어두운 조명 속에서 제가맡은 역할은 할로윈의 미스터리한 소녀였습니다. 바닥이 아닌 공중에 매달린 둥근 후프 위에서 움직여야 했기에, 작품의 분위기만큼이나 낯설고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에어리얼 후프가 발레보다 훨씬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움직여보니 후프는 몸을 힘들게 만드는 기구인 동시에, 내 몸의 무게를 대신 받아주는 지지대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 편안함을 얻기 위해서는 몸을 맡길 정확한 위치와 중심을 찾아야 했습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잠시 눈을 감다사진 속 동작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몸이 후프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후프가 체중을 받쳐주기 때문에 오히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면 대개 그림 앞에 가만히 서서 화면 속 색과 형태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빛의 벙커에서 만난 고흐의 작품은 액자 안에 멈춰 있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벽면을 가득 채운 색채가 음악과 함께 흘러가고, 익숙한 그림 속 풍경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고흐의 대표작인 〈별이 빛나는 밤〉이 실제 밤하늘처럼 움직이는 순간, 저는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무용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도 아니었고 미리 준비한 안무도 없었지만, 영상의 흐름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날의 짧은 시도는 명화와 미디어, 그리고 무용수의 움직임이 한 공간에서 만날 때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고흐의 명화가 살..
무용을 오래 하다 보면 몸을 움직이는 장소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거울이 있고, 평평한 바닥이 있고, 일정한 조명이 있는 공간입니다. 그 안에서는 거울을 통해 자세를 확인하고 바닥을 밀어내며 자연스럽게 내 몸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태국을 여행하면서 전혀 다른 공간에서 몸을 움직여보니 재미있는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바닥이 모래가 되기도 하고, 고정된 바나 폴 대신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기도 했으며, 거울 대신 거대한 산을 바라보며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장소가 달라지자 같은 몸인데도 움직임을 느끼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1. 나뭇가지에 몸을 맡기자 움직임이 달라졌다태국 홍아일랜드의 바닷가였습니다. 모래사장 뒤편에는 나뭇가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 있었는데, 당시 저는 한창 폴댄스를 배우..
거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연습 의욕이 뚝 떨어졌던 날이 있었습니다. 바 앞에 사람이 꽉 차서 제 모습이 전혀 비치지 않으면, 솔직히 그날 연습은 반쪽짜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답답함이야말로 제가 거울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였습니다. 무용수에게 거울은 분명 필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많이 본다는 것이 자신의 몸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거울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이유연습실에서 바 워크를 할 때, 앞줄에 사람이 많으면 거울에 제 모습이 제대로 안 보이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바 동작을빨리 끝내고 센터로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심지어 동작을 대충 넘긴 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거울..
극장이 없어도 공연은 가능하다고 했을 때, 반쯤은 동의하면서도 반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차장을 개조한 공간에서 쇼케이스를 해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장소 자체가 움직임과 뒤섞이면서, 계획하지 않은 것들이 공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습니다.공간이 달라지자 공연의 구조 자체가 달라졌습니다공연 장르 중에 사이트 스페시픽(Site-Specific) 퍼포먼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이트 스페시픽이란, 특정 장소의 물리적·역사적 맥락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공연 방식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장소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구성 요소가 되는 형식입니다.제가 공연했던 주차장 공간은 이 개념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