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신데렐라》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오직 몸짓과 음악만으로 두 시간짜리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처음 이 사실을 실감한 건 무대 위에서 직접 못된 언니를 연기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아름답게 추는 것만으로는 전혀 부족했고, 저는 그날 비로소 발레가 얼마나 치밀한 연기 예술인지 깨달았습니다.프로코피예프 음악이 만드는 감정의 지형도발레 《신데렐라》의 음악을 쓴 사람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입니다. 이 작품의 음악이 특별한 이유는 장면마다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데렐라의 고독한 일상을 묘사할 때와 화려한 무도회 장면, 그리고 자정을 앞둔 긴박한 순간은 같은 작곡가의 손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른 질감을 가집니다.특히 주목할 부분은 파드되(pas de deux) 장면입니다. 파드되란 두..
발레 무대에서 주인공을 맡으면 당연히 기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처음으로 주인공 역할을 받아 든 날, 저는 설레기보다 겁이 더 많이 났습니다. 창작발레 《개미와 베짱이》의 베짱이 역할이 제게 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익숙한 우화가 발레 무대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제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개미와 베짱이》, 어른이 되어 다시 보면 달라지는 이야기《개미와 베짱이》는 이솝 우화 중에서도 가장 오래, 가장 넓게 읽혀온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여름 내내 먹이를 모으는 개미와 노래하며 노는 베짱이가 대비되고, 겨울이 오면서 두 삶의 태도가 결과로 나타납니다(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이솝 컬렉션).어릴 때는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개미는 착하고 베짱..
배역 발표 날, 마녀 역할을 받았다는 걸 확인하고 속으로 "됐다"를 외쳤습니다. 발레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 형제의 동화를 춤과 마임(mime)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마녀를 연기하면서 테크닉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고,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보려 합니다.마녀 역할을 받던 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발레단에서 새 작품이 결정되면 배역 발표까지의 시간이 항상 긴장됩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이야기 구조가 뚜렷한 창작발레(original ballet)에서는 각 역할의 성격이 워낙 뚜렷해서 더 그랬습니다. 여기서 창작발레란 기존의 클래식 레퍼토리가 아니라 안무가가 새롭게 구성한 작품을 가리킵니다.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발레단과 안무가에 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