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안무도, 사전에 맞춰본 호흡도 없었습니다. 연극·음악·무용을 하는 사람들이 전시관 한 곳에 모여 그냥 '움직여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몰라 잠깐 멈춰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약속한 게 없는데 어느 순간 비슷한 속도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집단 즉흥이 왜 단순한 자유로운 움직임이 아닌지, 그날 제 몸이 먼저 알아챘습니다. 집단 감각 — 약속 없이도 흐름이 생기는 이유즉흥 움직임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흔히 '아무 생각 없이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서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자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공간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제각각 움직이고..
발레 바를 잡고 있어도 그것에 기대는 순간 훈련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처음 폴을 접했을 때 저는 이 차이를 몸으로 꽤 선명하게 느꼈습니다. 둘 다 수직으로 세워진 기구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발레 바는 왜 의지하면 안 되는가발레 바 훈련에서 바를 잡는 행위는, 스스로 중심을 잡기 위한 준비 동작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게중심(Weight Placement)입니다. 무게중심이란 몸 전체의 질량이 모이는 점으로, 이 지점이 발 위에 정확히 놓여야 바 없이도 자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는 그 감각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교정하기 위한 보조 장치일 뿐입니다.제가 발레를 처음 배울 때 선생님이 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바를 잡는 게 아니라 바 위에 손만 올려라..
폴 댄서 1,000시간당 약 8.95건의 부상이 발생한다는 전향적 코호트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폴댄스를 단순히 유연성 운동으로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왜 이 숫자가 나오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두려움 극복: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폴댄스에서 거꾸로 매달리는 동작을 처음 시도했을 때, 제가 먼저 부딪힌 장벽은 근력도 유연성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고공 공포, 즉 지면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높이 자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였는데도, 거꾸로 몸을 뒤집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 동작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몸을 반쯤 넘기다 멈추는 지점입니다. 상체와 하체의 방..
발레 작품에서 여성 무용수를 들어 올리거나 공중에서 받쳐주는 역할은 주로 남성 무용수가 맡습니다. 안정적으로 상대를 지탱하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여성이 서로를 서포트하며 공중 동작을 완성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무척 어렵고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폴 위에서 회전이 시작되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찾아왔습니다. 몸의 무게가 서포트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쏠리는 것이 아니라, 폴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연결점으로 나누어지는 듯했습니다. 서로의 중심과 코어를 정확히 유지하자 몸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고, 마치 회전력이 작은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습니다. 힘으로 들어 올리는 발레와 회전으로 연결되는 폴발레에서 남성 무용수는 여성 무용수의 허리나 몸통을 ..
태국 시밀란 아일랜드의 바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직이고 싶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투명한 물빛과 멀리 보이는 섬, 수면 위에 떠 있는 배까지 평소 연습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허리 정도 깊이의 바다로 천천히 들어가 풍경에 반응하며 즉흥적으로 팔을 움직였습니다. 특별히 정해둔 안무는 없었지만, 발레를 하며 오랫동안 몸에 익힌 포르드브라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물속에서의 포르드브라는 육지에서 했던 것과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왔습니다. 물 밖에 있는 팔은 자유롭고 부드러웠지만 물속에 잠긴 다리는 무겁고 느렸습니다. 부력은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고, 계속 밀려오는 파도는 중심을 흔들었습니다. 시밀란 아일랜드의 바다에서 나는 완성된 동작의 모양보다 물과 몸이 만..
발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카페를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자주 사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사원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고, 거리와 숙소 주변에서도 크고 작은 사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발리의 사원은 태국에서 보았던 사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짙고 어두웠으며, 오래된 돌과 섬세한 조각이 만들어내는 모습에서는 신비로우면서도 조금은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고, 몸의 움직임도 평소보다 차분해졌습니다. 그날 저는 사원 입구에서 천으로 몸을 감싸고 선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현지 사진사가 사용한 검은 아크릴 반사판을 통해 실제로는 없었던 물과 반영이 사진 속에 만들어졌습니다. ..
